맹뭉한 그녀 4(끝)
관심을 끄기로 생각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출근하는데 자꾸 아침에 대리러 가고 싶단 욕구가 샘솟았다. 지난 금요일 그녀를 아침 출근길에 태웠을 때 그녀에게서 나던 향기가 너무 싱그러워서 였을까? 매일 같이 출근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선물받은 비싼 향수도 뿌리고 다니고 했었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되려 반대로 아침 출근길 그녀의 향기에 취한꼴이라니 웃겼다.
"너 되게 좋은 향기 난다"
"저 향수 잘 안뿌리는데요?"
"그래 바디워시랑 샴푸 냄새가 좋네~"
"엄마가 쓰라고 주셨어요. 저는 비염 때문에 냄새 잘 못 맞아요."
그렇군 비염때문에 내가 뿌린 향수는 의미가 1도 없었구나 앞으로 뿌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향기의 진원지가 궁금한 나머지 정차중에 그녀의 팔과 머리카락을 잡고 코로 킁킁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변태같다고 느낄 수 있을텐데 하~~ 내 코가 너무 발달된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내 호기심을 막기에는 향기가 너무 좋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오트밀 바디워시 향기가 났고 머리결에서는 케라시스? 린스 향기가 났다. 둘 다 모두 익숙한 향기였고 섞여 있었지만 분명하게 바디워시와 린스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학시절 버스타고 다니면서부터 느꼈지만 버스 맨 뒷자리에 타고 가다가도 누군가가 방금 샤워하고 버스를 타면 버스 내부에 그 향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 근원지를 찾았고 그 상쾌한 향기에 매료되었다. 3분 뒤면 무뎌지긴 했지만 그 상큼한 향기는 밋밋한 기분을 200% 생기있게 해주는 마법과도 같았다. 그 사람의 미모나 몸매가 아니라 그 향기만으로 나는 그냥 무장해제되어 매료되고 마는 것이다. 다만 그 향기의 유효시간이 매우 짧다는게 흠이지만 도로 매연 냄새와 시장 고유의 냄새보다는 훨씬 좋았기에 한동안은 기분이 들떠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그녀를 바래다 주었지만 그녀는 이미 약속이 있었고 무언가를 둘이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예전과 다르게 차에서 핸드폰만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아무말도 없이 열중해서 하고 있나 봤더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순간 조금 짜증이 났다. 게임 까지것 할 수 있는데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는 목적지를 두고 게임이라니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아무말 없이 가기도 그렇기에 몇마디 질문을 던졌고, 뾰루퉁하게 말했더니 그녀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더 하면 안되겠다 라고 중얼거렸다. 이미 목적지는 코 앞이었다. 저 신호등만 바뀌면 2분 뒤 목적지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상대는 마음을 줄 생각이 1도 없는데 나만 애걸복걸 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 20대 때는 그래도 더 들이대고 사력을 다했다면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케바케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혼자만 감정을 쏟아내고 다시 담는 일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너무 이른 포기일 수 있지만 경험에 의하면 그렇더라. 그 타이밍과 시기를 놓치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녀를 집 앞에 내려주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또 멀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가는 시간보다 그녀를 바래다 주고 가는 길은 거리도 시간도 2배 더 걸렸다. 하필이면 저 멀리 첫사랑이 살았던 아파트와 그 아래 자주 가던 공원이 다리 건너로 보이고 있는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때의 추억이 다시금 생각나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차는 또 왜이렇게 막히는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퇴근길 뭔가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술을 왕창 먹고 4년만에 기억의 끝자락을 찾을 수 없었다.
갈팡질팡 하던 마음은 늘 가던 길로 익숙하게 핸들을 꺽으며 정리가 되었다. 평소보다 20분 가량 일찍 도착했다. 갈걸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속에 비추긴 했지만 이미 도착한걸 무를 수는 없다. 출근 시간 15분 전쯤 그녀가 왔고 아침 인사를 하는데 내 목소리는 냉랭했다. 인사를 하며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의 표정과 눈 또한 무덤덤했다. 그 날은 업무적으로도 개인 적으로도 그녀와 대화를 일절 나누지 않았다. 그저 출근, 퇴근 인사만 했을 뿐이다. 퇴근 길에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눈을 보는데 뭔가 할말이 있다는 표정같아 보였다. 나만의 착각인가 싶기도 하고, 그녀도 곧 나올 것 같아 차 시동을 걸고 5분정도 미련을 남기며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그주는 그녀와 많은 대화도 어떠한 스킨쉽도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았다. 업무적으로만 대했을 뿐 그 이상의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이제 사무실에서만 만나는 직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되려나 보다. 내가 했던 스킨쉽과 그녀가 받아준 행동에 대해서는 호감이 아니라 그녀가 거기까지 받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었다. 그게 나에 대한 호감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정말 그녀가 연애 고자인지 여우 탈을 쓴 토끼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랬다. 가는게 있으면 오는게 있기 마련인데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를 먼저 하자고 말한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잠깐의 설레임은 그 설레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문뜩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고 행동에 대해 그녀의 제스쳐가 정말 관심이 없었던 걸까?하는 물음표를 가져오긴 했지만 이내 그 생각마저 그만 하기로 했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주 알게된 사실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추론에 도달했는데 종종 그녀가 퇴근하는 시간과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버스타고 간다면 도착할 시간이 아닌데 이미 집이라고 하는 경우가 그랬다. 또 최근에 퇴근하면서 대려다줄까?라고 물었으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하여 먼저 퇴근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주에 생각나 말해보니 친구가 아니라 전 회사 직원이 바래다 줬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회사일이 많아 늦게 퇴근할 생각에 그녀가 먼저 퇴근했고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그때 보았던 흰색차에 타고있었다. 친구라고 하더니 전회사 직원이었고 친구라고 하기엔 10살 차이가 나기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바래다 주고, 밥사주고 술사주고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녀랑 사귀기 위해 남자가 들이대고 있는 거다. 그것도 어릴적 친구도 아니고 회사에서 알게된 직원이라면 뭐 뻔한 건데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제 완전 신경을 끌 수 있게 되었다. 뭐 당사자 입장에서는 호의를 배푸는데 거절은 할 수 없고, 나는 그 사람과 밥도 먹고 놀러도 가고 영화도 보지만 정식으로 사귀는건 아니니 아무 관계도 아닌거다 라고 하는 마인드 나는 그 마인드가 정말 싫다. 베푸는 사람이 그냥 좋아서 하는 거라면 뭐 서로 상관없겠지만 말이다.